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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이야기
18전대의 못다한 추억들....
박**
|Views 352
|2009.08.20
** 김대중 前대통령님의 서거를 애도합니다**
1. 제대동기인 222기 홍**병장님과의 추억
18전대 헌병대 행정계 생활이 조금 익숙해지면서 순찰반에서 근무하는 222기 홍**병장(실질적인 보직은 없슴) 선배님과의 추억담이다.
홍선배님은 어떻게 하다 보니 동기들과 전역을 할 수 없이 242기인 나와 같이 제대를 하게 된다고 나를 보면 제대동기 제대동기라고 하신다.
틈만 나면 우리 제대동기끼리 술 한 잔 하자시며 입장 난처하게 하신다.
실상 나는 술을 전혀 하지 못하여 술자리라면 어떠한 핑계를 대고라도 피한다.
일병 고참 정도 된 어느 날 홍선배님께 잡혀 동진휴게실(민간인이 운영하는 부대안의 음식점)로 가게 되었다.
돼지고기 김치볶음에 막걸리를 시켜 한잔 가득 채워 주시며, 쭉 한잔 들이 키라고 권하신다. 막걸리나 소주 한잔에 몸이 후 꾼 거리고 얼굴이 빨게 지는 체질로 조금 입에 되고 내려니 굴밤을 한 대 먹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막걸리 한 주전자를 반은 너 가 무조건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순히 고분고분 먹다보면 계속 힘들게 할 것 같아 잔머리를 굴리기로 마음 먹고 애라 한번 술주정을 부려 보기로 한다.
이후 연속 세잔을 먹고는 술주정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야 너 날 왜 날 못 살게구려 라고 소리치며 술잔으로 탁자를 탁탁 치며 몇 차례 고함 고함치니 홍선배님은 당황하여 야 이 세끼 영 술 버릇이 안 좋다.
라고 하시며 이제는 너하고 절대로 술 안 먹는다며 빨리 들어가 자라고 하신다. 그 이후 다른 병사들에게 제 술 주정이 심하니 같이 술 먹지 말라며 이야기를 한다.
그 이후로 잘 대해 주었는데 전역 전에 다른 부대로 전출 가 소식을 못 들다가, 전역 후 미국에 이민 가 가끔 서울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후 88년 서울올림픽 전후, 강릉헌병대 선. 후배 모임 (명칭은 강헌회로 지금도 세 달에 한 번씩 모임 을 함) 에 한번 참석하여 본이 후로는 소식이 없다.
미국에서도 건강히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여 진다.
2. 백차 전복사고
이때도 일병 고참시절 김**대장님 시절 222기 노병장님과 배병장님 두 분이 하루는 음주를 하고 백차를 몰고 시내로 가다가 논에 백차를 전복시켜버린 대형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아침에 사무실에 나 오니 당직대가 온통 술 냄새로 진동한다.
대장님께서 일찍 출근 하시어 노발대발 하시는 것이다.
눈치를 살펴보니 백차가 안보이며 백차 운전병인 이**일병이 정신없는 얼굴로 옆에 보이며 상황이 좀 감지되는 것이다.
잠시 후 대장님께서 혁대로 누굴 때려 피가 나는 것이다. 눈치 빠른 이상병(보급담당)이 잽싸게 비상구급약을 갖고 와 대장님, 대장님 손에서 피가 나는 것 같습니다. 빨리 치료 하셔야 됩니다. 라고 왜 치니 나는 안 다쳤으니 다친 노병장을 빨리 의무대로가 치료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두 사람은 전역을 얼마 안 남겨두고 한잔하다 보니 큰 사고를 내고 만 것이다. 얼마 후 두 선배의 부모님과 형님이 부대로와 상부에 보고하지 않기로 하고 차량을 수리하고 고향으로 돌아 가셨다.
자우 간 사회나 군이나 음주 후 절대로 운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다행이 인명 피해가 없었으나 사람을 다치게 하였다면 두 사람도 불행이지만 피해자의 가정은 얼마나 황당하여 질 것인가.
3. 목사님을 발로 찬 사건
어디선가 목회 활동을 열심히 하고 계실 목사님을 생각하며 18전비에 전속 받아 경비 근무를 할 때의 이야기이다.
일요일 새벽 근무를 마치고 오전 6시에 하번 하여 내무반에서 곤히 취침을 하고 있는데 8시경 인가 비몽사몽 하는 순간 누군가가 발을 흔들며 깨우는 것 같았다.
비상이 걸리지 않는 상향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초병 취침은 누구도 방해를 하지 않는데 잠을 깨우니 나도 모르게 발을 차게 되었다. 짜증나 일어나보니 대위 계급장을(군목으로 18전대에 오신지 얼마 안 된 목사님) 단 장교님께서 얼굴을 만지며 웃는 얼굴로 그만 자고 교회로 가자는 것이다. 아마 야근 근무 취침 조 인줄 잘 모르시고 일요일 늦잠을 자는 장병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대위님 저의는 새벽 근무를 마치고 취침 중이니 깨우시면 안 됩니다. 라고 하니 미소를 지의시며 미안하다시며 돌아가신다.
나중에 미안한 마음으로 두 번인가 기지교회에 간 기억이 난다.
옛날 시골에서 방학 때면 대학생 형, 누나들이 농촌봉사활동을 나와 공책과 연필을 나누어주며 다리 밑으로 아이들을 모이게 하여 찬송가를 가르쳐 주던 시절, 그 후 처음 찬송가도 불려보고, (실상은 가사를 잘 몰라 입만 벙긋 벙긋 하였지만) 난생처음 자발로 교회란 곳을 찾아가게 되었다.
끝난 후 준 사과 두알 오래 오래 추억이 된다.
목사님 그땐 사과도 못하였는데 나도 모르게 목사님을 발로 차게 된 점 35여년이 지난 지금 글로서 사과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