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부대 임무엔 북한 부전강댐 폭발도 있었다”
기간병 출신들, 당시 특수훈련 모습 담은 사진 공개
이승경 기자
▲ 실미도 부대 특수훈련 모습 담은 사진
실미도 사건이 일어난 지 34년이 지난 23일 오후 실미도전우회는 북한의 부전강 댐 폭발도 실미도 부대 창설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고 주장하고,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특수 훈련 모습을 담은 사진을 공개했다.
실미전우회는 이날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된 옛 부대원들의 묘지에 헌화한 뒤, 실미도 부대가 김일성 암살과 함께 북한 부전강 발전소 폭발을 목적으로 창설되었다는 점을 공개했다. 이준영 실미도전우회 사무국장은 “북한의 부전강 댐 폭발도 실미도 부대의 목적이었으나 한국이 평화의 댐을 만들면서 북한이 물바다를 만들려 한다고 얘기한 사실을 뒤집을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며 “실미도 부대의 창설 목적은 김일성 암살과 북한의 부전강 댐 폭발 등 2개였다”고 주장했다.
실미도전우회가 이날 공개한 6장의 사진에는 B조 소대장이었던 김이태씨와 공작원이 함께 당시 공군에서 특수제작한 기구를 타고 서울 오류동 공군부대에서 경남 사천비행장까지 훈련을 벌이는 모습이 담겨 있다. 또, 훈련에 앞서 당시 공군본부 정보국장인 이주표 준장이 실미도 부대원들을 찾아 격려하는 모습, 김포공군부대에서 비행기를 타고 출발해 과천에서 낙하훈련 모습, 인천 팔미도 앞바다에서 생환훈련을 하는 모습 등도 기록돼 있다.
실미도전우회는 이날 국가를 상대로 자신들의 입장을 담은 공개질의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공개질의서에서 “실미도 훈련 당시 사진을 보더라도 기간병과 공작원들은 똑같이 훈련을 받고 국가를 위해 충성했으나 우리에게 돌아온 건 국가의 외면뿐이었다”며 “실미도 부대원들의 명예를 회복해주고 특수임무수행자로 인정해달라”고 주장했다. 또 “국가는 부대원들에게 생명수당과 벽·오지 수당을 지급해야 하는데도 이를 지키지 않았다”며 수당지급을 요구했다.
이에 앞서 이날 오전, 34년 전 공작원들이 수류탄으로 자폭했던 서울 노량진 유한양행 앞에서는 공작원 유가족, 실미도 기간병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제가 열렸다. 다음은 실미도전우회가 발표한 공개질의서 전문이다. 이승경 기자 yami@hani.co.kr
■ 실미도 군반란사건 34주기를 추모하며
실미도 군 반란 사건 34년이 지난 오늘 8월23일 국립묘지와 노량진 유한양행 앞에서는 서로 똑같지만 다른 애절한 추모제가 진행됩니다. 동작동 국립묘지에서는 한솥밥을 먹고, 생사고락을 같이한 공군 북파공작원들의 반란으로 죽임을 당한 넋들을 위하여, 노량진 유한양행 앞에서는 김일성 집단의 무장공비 침투로 대한민국 수반인 박정희 대통령 목아지를 따러왔다(김신조 말그대로)는 124군 부대의 경악스러운 말투와 목적에 대한 기자 회견에 국가와 전 국민의 총궐기 대회가 연일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당장 똑같이 보복을 하여 조국을 굳건히 지키자고 외쳤습니다.
▲ 실미도 부대 특수훈련 모습 담은 사진
그 국민들의 힘에 정부도 동승하여 실미도 부대가 창설되었지만 국제 데탕트 등의 평화 무드가 조성되어 북파공작은 취소되고 공작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군당국에서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더이상 기다리지 못한 공작원들이 국가에 해답을 얻기 위하여 있어서는 절대로 안되는 반란을 일으켜 전대미문의 사건(아군이 아군을 죽이는)이 발생하여 교육대장 김순웅 상사의 이마를 장도리로 쪼개 죽이고 소대장 교관 조교 등을 사살하고 실미도를 탈출해 청와대로 가는 도중 노량진 유한양행 앞에서 가로수를 들이받고 상황이 종료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북파공작 훈련생들의 유가족은 30년이 넘게 행방불명된 가족의 소식을 실미도 전우회원들의 증언과 사진공개, 공작원 명단공개로 이제서야 확인을 하게 됐습니다. 훈련생들의 유가족 또한 억울하고 분통함을 또한 그 원혼을 달래려고 노량진 유한양행 앞에서 노제를 올리는 것입니다.
8월17일 오후 충북 청주의 한 식당에서 김양구 실미전우회 회장과 이준영 실미전우회 사무국장, 정기족 공작원 유가족 대표, 임홍빈 공작원 유가족 전 총무 등 4명은 어려운 만남을 갖고 그동안 실미도 생활상과 반란 사건의 배경 등에 얘기를 나눴습니다. 이 자리에서 정기복 대표는 “우리 유가족들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된 실미도 기간요원 유가족들에게 찾아가 국가의 잘못으로 인하였지만 어쨌던 살인자의 가족으로서 백배만배 사죄를 드리고 헌화를 하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위로드리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그 얘기에 또 한번 가슴이 메어왔으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실미전우회는 전우회를 결성하면서 공작원들도 또한 전우로서 위령비에 같이 이름을 넣으려고 하여 청주 공군 정보교육대안에 위령비를 세워놓았습니다. 앞으로 모든 일에 공동체가 되려 실미도 소설작가 백동호씨를 통하여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공작원 유가족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올해 8월18일에서야 어려운 자리가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크게는 남북 분단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실미도 모든 이에게는 국가 존폐를 위해 희생당해 국립묘지에 안장된 옛 전우들과 시신도 찾을 수 없는 공작원들 그리고 생존해 있는 실미도 전우회원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처만 안고 사는 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국가의 존폐위기에서 목숨을 받쳐 명령을 받아 충실히 임무수행을 했습니다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대통령, 국무총리, 국가인권위원회, 국방부, 공군본부에 200 년 월 일자로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나 모두 국방부로 이관처리했다는 통보만 받았습니다. 국방부 답변은 그 당시 생명수당, 특근수당, 벽지·오지수당은 없었고, 특식수당은 현금이 아니라 우유와 빵으로 현물지급 하였다는 답신만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실미도에서는 꽁보리밥도 원래 양을 지급하지 않았는데 무슨 우유와 빵을 받았다는 말인가요. 대신 국방부에서는 우리 전우들에게 국방부 실미도 진상조사에 적극 협조해달라는 부탁만 해왔고, 우리는 국방부에 적극 협조하였습니다. 현재 군 과거사 실미도 진상조사위원회에서는 그 당시 생명수당, 벽·오지 수당 등이 지급된 사실과 그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실미도 부대를 직접 관장하고 명령서를 하달하였음을 조사결과 확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미전우회 회원들은 서초동에 있는 특수임무수행자보상위원회에 7월20일과 7월29일 2차례에 걸쳐 서류를 접수하려 했으나 접수거부 당해 또 한번 국가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악마로 취급당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인터넷에 실미도 전우회원은 무자비하고 인정사정 없는 인간이하로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미도 전우회원들은 공작원들이 북파되어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훈련강도는 높게 하였습니다. 대신 휴식은 편안하고 따뜻하게 대해 왔는데…
당시 지급해야 할 생명수당, 벽·오지 수당은 상부에서 떼어먹고 특수임무 수행자로 인정받지도 못한 우리 전우들은 거의 폐인이 되거나 죽었습니다(황석종, 김방일, 도해수). 서해교전 유가족들이 조국을 버리고, 육군총기난사 사건의 장병들의 후유증이 있는 것처럼 우리들은 난동사건 당시 수류탄으로 자폭한 공작원들의 갈가리 찢어진 시체를 수습하고 그 무더운 여름 부패한 시신을 확인하고 심문 받고 공군에서는 보안상의 이유로 격리 근무시키고 지금은 존재 자체를 인정하여 주지도 않습니다. 특수임무 수행은 도대체 무엇이고, 국가유공자는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원칙을 알 수 없는 국가보상자 규정으로 인해 목숨을 내놓고 과연 어느 누가 국가를 위해 충성하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국방부 조사에 성실히 임했습니다. 이제껏 모든 매스컴에서 악마가 되었던 실미도 전우회원들에게 명예회복과 그 당시 받지 못한 생명수당, 벽?오지수당 등의 진상 또한 밝혀주십시오. 혹시 저희가 실미도 공군북파공작원 사진 및 명단 공개로 인해 미운털이 박힌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3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국가에 다음과 같이 공개 질의합니다.
1. 중앙정보부의 지시와 특별관리로 실미도 부대를 창설시켜 매년 년2회씩 감사하며 만들어놓은 특수임무 수행을 진행 중이던 교관, 조교 공작원은 특수임무 수행자가 아닌가요?
▲ 실미도 부대 특수훈련 모습 담은 사진 2. 군으로서는 최초로 자체 제작한 기구를 타고 서울 오류동(2325부대)에서 출발하여 경남 사천비행장까지 B조 소대장이었던 김이태씨와 공작원이 동승하여 목숨을 받쳐 침투 훈련을 한 것은 공작원들만 특수임무수행자로 볼 수 있는 것입니까?(사진자료 1번)
3. 기구훈련 출발당시 공군본부 정보국장인 이주표 준장은 “꼭 성공하라”고 격려차 현장에 답사나온 것은 또 무엇입니까? (사진2)
4. 낙하산 훈련으로 김포공항에서(사진 3) 비행기에 탑승하여 과천벌판(사진 4)에 공작원들과 공수훈련을 한 것은 무엇입니까?
5. 바다 생환훈련을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사진 5)
6. 상사를 대위로(김순웅 교육대장) 하사를 소위로(김이태, 도해수, 김양구, 김방일 등) 하사를 상사로(김성진, 송석주, 조대희 등) 이병, 일병을 하사로(기간병들) 군번과 계급장을 달고 항상 24시간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칼빈소총과 대검을 차고 군생활을 하며 야간에 또한 경비근무를 서는 것은 특수임무 수행이 아닙니까?
7. 우리 전우들은 공군 인사기록부에 육군에 편제되고 공군 2325부대 209파견대(실미도 부대)에 근무하고 있어도 엉뚱한 지원대나 다른 비행단 소속으로 인사기록이 되어있는 것은 무슨 숨은 뜻이 있는 걸까요?
8. 실미도 부대 전반기(1968년4월1일~1969년12월)에는 특수교관들로 공작원 훈련에 만전을 기한 수행능력이 탁월한 교관과 조교들로 팀이 이루어졌습니다. 후반기(70년1월~71년8월23일)에는 일반 하사관과 이병 일병 등 인원 채우기에 급급한 형식상의 인원배치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능력에 차이가 납니다. 이는 국가에서 군에서 사고를 방치하는 원인제공이고 이에 대한 책임은 국가에서 공작활동 작전을 포기한 국가에서 책임을 통감해야 하지 않습니까?
9. 실미도 부대원들은 제대할 때 20년 이상 군기밀을 유출하지 말도록 했고, 만일 공개하면 군사재판에 회부한다고 쓰게 한 각서는 국가특급비밀이기 때문 아닙니까. 이 것만 봐도 군 특수임무 수행에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까?
10. 당시 소대장 및 특수교관들(68년 4월1일 특수임무수행자)은 작전성공 종료와 동시에 현지장교임관 약속은 무엇이며, 공작원들도 작전성공을 하면 장교로 임관 시키겠다고한 약속은 무엇이었습니까?
11. 당시 지급하기로 한 생명수당, 벽·오지수당 등은 어떤 경로에서 착복하였는지 몰라도 실미도 근무자에게 당연히 지급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12. 71년 8월 23일 실미도 사건 당시 목에 관통상을 입은 양동수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생명을 건지라고 공군 항공의료원장에게 특별지시를 내린 것은 무엇입니까?
13. 실미도 전우회 생존자들은 심한 스트레스와 압박감, 모멸감, 정신 불안 등으로 모두가 고통 속에 살고 있으며 그 중에는 이미 고인이 된 황석종(2004년4월2일, 평생의 스트레스로 인하여 간암 발병으로 사망), 김방일(2005년5월 목욕탕에서 급사), 도해수(실미도 최초 소대장, 공작원이 대형 칼로 살해하려다 살해미수 사건으로 충격 받아 정신이상으로 실미도에서 철수, 정신이상으로 인해 사망) 한상구는 정신병으로 6급 장애판정, 양동수는 실미도 사건당시 목에 관통상의 후유증으로 7급 장애 판정, 안지근은 장 협착증으로 소장을 2번 절재 수술, 송석주는 디스크 수술 및 어깨탈골로 어깨를 못 씀. 이준영은 공군 항공의료원에서 두 차례 입원 다리수술 및 부작용으로 5개월간 입원 및 오랜 약물복용으로 위궤양 및 십이지장 궤양, 신경과민으로 고혈압 발병, 이태환은 후두암 수술 후 항암치료 중, 권오관은 후두수술 후 병원치료중 등 실미도 전우회 회원 16명중 2명 사망 7명은 환자입니다. 이 모든 것은 34년 동안 실미도 생존자들은 국가비밀에 쌓여 후유증의 고통을 국가는 다시 한번 법해석을 명쾌히 하여 명예 및 보상금, 생명수당을 지급받아 국가에 충성하여 명예로운 나머지 삶을 누리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05년 8월23일 실미도전우회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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